후지와라노 히데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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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12세기 오슈 후지와라 씨의 3대 당주로, 데와국과 무쓰국을 지배하며 17만 기병을 거느린 유력자였다. 교토의 헤이케 정권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보호하며 가마쿠라 막부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대립했다. 냉정하고 호방한 인물로 묘사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앙 정계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요리토모의 견제를 받았다. 히데히라 사후 오슈 후지와라 씨는 멸망했지만, 그의 유해는 미라 형태로 주손지 곤지키도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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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야스히라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3대 당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아들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압박에 요시쓰네를 살해하고 가문이 멸망하는 과정을 겪었으며, 결국 가신에게 배신당해 죽임을 당했다. - 오슈 후지와라씨 - 불타오르다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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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히데히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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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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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 |
별명 | 히데히라(秀平), 지로(次郎) |
출생 | 호안(保安) 3년(1122년)? |
사망 | 분지(文治) 3년 음력 10월 29일(1187년 11월 30일) |
묘소 | 이와테현(岩手縣) 히라이즈미정(平泉町) 주손지(中尊寺) 곤지키도(金色堂) |
시대 | 헤이안 시대 말기 - 가마쿠라 시대 초기 |
관직 | |
관위 | 데와(出羽), 무쓰(陸奧) 압령사, 종5위하 진수부장군(鎮守府將軍), 종5위상 무쓰노카미(陸奧守) |
가문 | |
씨족 | 오슈 후지와라 씨(奧州藤原氏)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후지와라노 모토히라(藤原基衡) |
어머니 | 아베노 무네토(安倍宗任)의 딸? (이설 있음) |
형제 | 히데히라, 쓰가루 히데나가(津經秀英), 히즈메노 도시히라(樋爪俊衡), 도쿠니코(徳尼公) (이와키 노리미치(岩城則道)의 부인) |
배우자 | 정실: 후지와라노 모토나리(藤原基成)의 딸, 사사키 히데요시(佐佐木秀義)의 백모?, 첩?: 에미시(蝦夷)의 딸, 아내?: 시노부 사토 씨(信夫佐藤氏)의 딸 |
자녀 | 구니히라(國衡), 야스히라(泰衡), 다다히라(忠衡), 다카히라(高衡), 미치히라(通衡), 요리히라(藤原賴衡), 딸? |
기타 | |
통칭 | 지로(次郎), 히데히라(秀平) |
2. 생애
호겐 2년(1157년), 아버지 모토히라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아 오쿠로쿠군의 주인이 되었다. 데와국과 무쓰국의 오료시로서 양국에 걸친 군사・경찰권을 위임받았으며, 여러 군의 군지를 중심으로 하는 무사단 17만 기를 통솔했다.
당시 수도에서는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을 거치며 헤이케가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히데히라는 멀리 떨어진 오슈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 오슈 후지와라 씨의 거점이었던 히라이즈미는 헤이안쿄에 버금가는 인구를 자랑하며 불교 문화를 꽃피운 대도시였다. 히데히라의 재력은 오슈 지역의 명마와 사금 생산에 기반했으며,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중앙 정계에 공물과 말을 바치고 사찰과 신사에 기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무쓰노카미로 부임해 온 인가신 후지와라노 모토나리의 딸과 혼인하여 중앙 정계와도 연줄을 맺었다.
가오 2년(1170년) 5월 25일, 히데히라는 종5위하 친위부장군에 임명된다[10]. 우다이진 쿠죠 카네자네는 자신의 일기 『교쿠요』에서 히데히라를 "오슈의 오랑캐"라고 칭하며, 그의 임명을 "난세의 시작"이라고 한탄했다[11]. 수도의 귀족들은 오슈 후지와라 씨의 막대한 재력을 인지하면서도, 그들의 군사력이 천하의 정세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랑캐로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안겐(安元) 무렵, 교토의 구라마 산(鞍馬山)에서 도망쳐 나온 겐지의 온조시(御曹司)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를 거두어 숨겨주고 길렀다. 지쇼(治承) 4년(1180년), 요시쓰네의 형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헤이시(平氏) 타도를 외치며 거병하자, 요시쓰네는 형에게로 가서 거병에 동참하고자 했다. 히데히라는 요시쓰네를 극구 말렸지만 끝내 요시쓰네는 몰래 오슈를 빠져나와 요리토모에게로 갔고, 히데히라는 아쉬워하면서도 휘하의 사토 쓰구노부(佐藤繼信) ・ 사토 다다노부(佐藤忠信) 형제를 보내 요시쓰네에게 붙여주어 전송하였다.
요와(養和) 원년(1181년) 8월 25일, 히데히라는 종5위상 ・ 무쓰노카미로 서임되었는데, 에치고 국(越後國)의 호족 ・ 조 나가시게(城長茂)도 에치고노카미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 사후 헤이케의 도료(棟梁)가 된 다이라노 무네모리(平宗盛)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 앞서 거병한 가마쿠라(鎌倉)의 요리토모나 시나노(信濃)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정의 구교였던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는 "천하의 수치가 어디 이같을 수 있으랴, 슬프고도 슬프구나"라고 자신의 일기에 한탄하는 말을 남겼고, 산기(參議)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經房)도 "사람으로서 한탄스러워 차마 기록할 수도 없다"고 자신의 일기 《깃키(吉記)》에 적었다.
히데히라는 관위를 미끼로 자신들의 목적에 끌어들이려는 헤이케의 의도에 이용당하지 않았다. 지쇼-주에이의 난이 한창 벌어지던 때에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나 헤이시의 군사 동원 요청에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면서, 헤이케에 의해 불타버린 도다이지(東大寺) 재건과 대불 도금을 위해 벌인 모금에서 겐랴쿠(元曆) 원년(1184년) 6월, 요리토모가 바친 것보다 다섯 배나 많은 황금 5000냥을 기부하는 등 교토 여러 세력들과의 관계 유지에도 힘썼다. 교토와 반도(坂東)의 정세를 통찰한 이러한 히데히라의 외교 수완 덕분에 히라이즈미는 겐페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일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12][13][14]
분지 2년(1186년), 헤이케가 멸망하고 세력을 확대한 가마쿠라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히데히라에게 "무쓰에서 교토로 바쳐 올리는 말과 금은 내가 중개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이는 겐지뿐 아니라 어떤 세력의 중개와 간섭도 받지 않고 교토와 직접 교섭해 온 오슈 후지와라 씨를 무시하고, 히데히라를 요리토모보다 낮춰 보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히라는 곧장 가마쿠라와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자 가마쿠라의 요구대로 말과 금을 가마쿠라로 보냈다.[15][16]
이듬해 분지 3년(1187년) 2월 10일, 히데히라는 요리토모와 대립하다 쫓겨온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요리토모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각오하고 다시 한 번 받아들였다.[17] 이는 이미 가마쿠라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내린 결정이었다.
같은 해 4월, 요리토모는 조정을 통해 히데히라에게 다음 세 가지를 요구했다.[18]
- 시시가타니 음모 사건으로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의해 오슈로 유배되었던 나카하라 모토카네를 히데히라가 억류하고 있는데, 즉시 교토로 돌려보낼 것.
- 무쓰 국에서의 사금 공납이 해마다 줄고 있는데, 도다이지 재건에 필요한 도금용 금 3만 냥을 바칠 것.
- 헤이케 추토 과정에서 오슈 후지와라 씨가 특별히 세운 공이 없을 것.
히데히라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 모토카네는 본인이 돌아가기 싫어하여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 내버려 두었을 뿐, 신병을 속박하여 잡아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 황금 공납은 선례로도 정해진 양이 1천 냥을 넘은 적이 없고, 특히 근년에 상인들이 경내에 많이 들어와 사금을 전매하여 채굴하고 있어서 따르기 곤란하다.
요리토모는 인젠(院宣)에도 겁내지 않고 자신의 요청도 승낙하지 않는 히데히라의 모습에 몹시 괴이하게 여겼다. 조정을 통해 오슈 후지와라 씨에 더욱 압력을 넣어줄 것을 요청하는 가운데, 9월 4일 요시쓰네가 히라이즈미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 요리토모는 "히데히라 뉴도(入道)가 전(前) 이요노카미(요시쓰네)를 끼고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무쓰 국에 인쵸하문(院廳下文)이 내려졌다. 히데히라는 다른 마음은 품고 있지 않다고 변명했지만, 요리토모가 오슈로 파견했던 조시키(雜色)까지 "반역할 뜻이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두 달 뒤, 요시쓰네가 히라이즈미로 들어간 지 9개월이 되는 분지 3년(1187년) 10월 29일, 히데히라는 병으로 사망한다.[19] 그는 죽기 전, 아들 야스히라와 구니히라, 그리고 요시쓰네 세 사람에게 기청문을 쓰게 했다. 요시쓰네를 주군으로 섬기고,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요리토모의 공격에 맞서라는 유언을 남겼다.[20]
히데히라는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정실 부인이 낳은 차남 야스히라가 후계자였다. 하지만 측실 소생의 장남 구니히라도 무예가 뛰어나고 집안에서의 기대가 높아, 이복 형제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히데히라는 이를 우려하여 형제간의 화합을 위해 자신의 정실 부인을 구니히라와 재혼시켜, 구니히라와 야스히라 사이에 의붓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게 했다. 이를 통해 형제간의 충돌을 막으려 했지만, 형제간의 갈등과 요리토모의 침략을 걱정하며 죽음을 맞이했다.[20]
2. 1. 북방의 왕자(王者)
호겐 2년(1157년), 아버지 모토히라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아 오쿠로쿠군의 주인이 되었다. 데와국과 무쓰국의 오료시로서 양국에 걸친 군사・경찰권을 위임받았으며, 여러 군의 군지를 중심으로 하는 무사단 17만 기를 통솔했다.당시 수도에서는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을 거치며 헤이케가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히데히라는 멀리 떨어진 오슈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 오슈 후지와라 씨의 거점이었던 히라이즈미는 헤이안쿄에 버금가는 인구를 자랑하며 불교 문화를 꽃피운 대도시였다. 히데히라의 재력은 오슈 지역의 명마와 사금 생산에 기반했으며,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중앙 정계에 공물과 말을 바치고 사찰과 신사에 기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무쓰노카미로 부임해 온 인가신 후지와라노 모토나리의 딸과 혼인하여 중앙 정계와도 연줄을 맺었다.
가오 2년(1170년) 5월 25일, 히데히라는 종5위하 친위부장군에 임명된다[10]. 우다이진 쿠죠 카네자네는 자신의 일기 『교쿠요』에서 히데히라를 "오슈의 오랑캐"라고 칭하며, 그의 임명을 "난세의 시작"이라고 한탄했다[11]. 수도의 귀족들은 오슈 후지와라 씨의 막대한 재력을 인지하면서도, 그들의 군사력이 천하의 정세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랑캐로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2. 2. 지쇼-주에이의 난
안겐(安元) 무렵, 교토의 구라마 산(鞍馬山)에서 도망쳐 나온 겐지의 온조시(御曹司)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를 거두어 숨겨주고 길렀다. 지쇼(治承) 4년(1180년), 요시쓰네의 형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헤이시(平氏) 타도를 외치며 거병하자, 요시쓰네는 형에게로 가서 거병에 동참하고자 했다. 히데히라는 요시쓰네를 극구 말렸지만 끝내 요시쓰네는 몰래 오슈를 빠져나와 요리토모에게로 갔고, 히데히라는 아쉬워하면서도 휘하의 사토 쓰구노부(佐藤繼信) ・ 사토 다다노부(佐藤忠信) 형제를 보내 요시쓰네에게 붙여주어 전송하였다.요와(養和) 원년(1181년) 8월 25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종5위상 ・ 무쓰노카미로 서임되었는데, 에치고 국(越後國)의 호족 ・ 조 나가시게(城長茂)도 에치고노카미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 사후 헤이케의 도료(棟梁)가 된 다이라노 무네모리(平宗盛)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 앞서 거병한 가마쿠라(鎌倉)의 요리토모나 시나노(信濃)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정의 구교였던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는 "천하의 수치가 어디 이같을 수 있으랴, 슬프고도 슬프구나"라고 자신의 일기에 한탄하는 말을 남겼고, 산기(參議)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經房)도 "사람으로서 한탄스러워 차마 기록할 수도 없다"고 자신의 일기 《깃키(吉記)》에 적었다.
히데히라는 관위를 미끼로 자신들의 목적에 끌어들이려는 헤이케의 의도에 이용당하지 않았다. 지쇼-주에이의 난이 한창 벌어지던 때에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나 헤이시의 군사 동원 요청에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면서, 헤이케에 의해 불타버린 도다이지(東大寺) 재건과 대불 도금을 위해 벌인 모금에서 겐랴쿠(元曆) 원년(1184년) 6월, 요리토모가 바친 것보다 다섯 배나 많은 황금 5000냥을 기부하는 등 교토 여러 세력들과의 관계 유지에도 힘썼다. 교토와 반도(坂東)의 정세를 통찰한 이러한 히데히라의 외교 수완 덕분에 히라이즈미는 겐페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일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12][13][14]
2. 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의 관계
분지 2년(1186년), 헤이케가 멸망하고 세력을 확대한 가마쿠라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에게 "무쓰에서 교토로 바쳐 올리는 말과 금은 내가 중개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이는 겐지뿐 아니라 어떤 세력의 중개와 간섭도 받지 않고 교토와 직접 교섭해 온 오슈 후지와라 씨를 무시하고, 히데히라를 요리토모보다 낮춰 보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히라는 곧장 가마쿠라와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자 가마쿠라의 요구대로 말과 금을 가마쿠라로 보냈다.[15][16]이듬해 분지 3년(1187년) 2월 10일, 히데히라는 요리토모와 대립하다 쫓겨온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요리토모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각오하고 다시 한 번 받아들였다.[17] 이는 이미 가마쿠라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내린 결정이었다.
같은 해 4월, 요리토모는 조정을 통해 히데히라에게 다음 세 가지를 요구했다.[18]
- 시시가타니 음모 사건으로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의해 오슈로 유배되었던 나카하라 모토카네를 히데히라가 억류하고 있는데, 즉시 교토로 돌려보낼 것.
- 무쓰 국에서의 사금 공납이 해마다 줄고 있는데, 도다이지 재건에 필요한 도금용 금 3만 냥을 바칠 것.
- 헤이케 추토 과정에서 오슈 후지와라 씨가 특별히 세운 공이 없을 것.
히데히라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 모토카네는 본인이 돌아가기 싫어하여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 내버려 두었을 뿐, 신병을 속박하여 잡아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 황금 공납은 선례로도 정해진 양이 1천 냥을 넘은 적이 없고, 특히 근년에 상인들이 경내에 많이 들어와 사금을 전매하여 채굴하고 있어서 따르기 곤란하다.
요리토모는 인젠(院宣)에도 겁내지 않고 자신의 요청도 승낙하지 않는 히데히라의 모습에 몹시 괴이하게 여겼다. 조정을 통해 오슈 후지와라 씨에 더욱 압력을 넣어줄 것을 요청하는 가운데, 9월 4일 요시쓰네가 히라이즈미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 요리토모는 "히데히라 뉴도(入道)가 전(前) 이요노카미(요시쓰네)를 끼고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무쓰 국에 인쵸하문(院廳下文)이 내려졌다. 히데히라는 다른 마음은 품고 있지 않다고 변명했지만, 요리토모가 오슈로 파견했던 조시키(雜色)까지 "반역할 뜻이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두 달 뒤, 요시쓰네가 히라이즈미로 들어간 지 9개월이 되는 분지 3년(1187년) 10월 29일, 히데히라는 병으로 사망한다.[19]
2. 4. 죽음
히데히라는 분지 3년(1187년) 10월 29일에 사망했다.[19] 히데히라는 죽기 전, 아들 야스히라와 구니히라, 그리고 요시쓰네 세 사람에게 기청문을 쓰게 했다. 요시쓰네를 주군으로 섬기고,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요리토모의 공격에 맞서라는 유언을 남겼다.[20]히데히라는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정실 부인이 낳은 차남 야스히라가 후계자였다. 하지만 측실 소생의 장남 구니히라도 무예가 뛰어나고 집안에서의 기대가 높아, 이복 형제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히데히라는 이를 우려하여 형제간의 화합을 위해 자신의 정실 부인을 구니히라와 재혼시켜, 구니히라와 야스히라 사이에 의붓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게 했다. 이를 통해 형제간의 충돌을 막으려 했지만, 히데히라는 형제간의 갈등과 요리토모의 침략을 걱정하며 죽음을 맞이했다.[20]
3. 인물
냉정침착하고 호방한 인물로, 대부분의 작품에서 영걸한 군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사금 산출이나 연해주와의 교역 등으로 막대한 경제력을 쌓았으며, 교토의 우지 뵤도인(平等院) 봉황당(鳳凰堂)을 본떠 무료코인(無量光院)이라는 대사원을 짓는 등 북방의 땅에 왕도(王道)가 구현되는 낙토(樂土)를 재현하고자 애썼다.[19]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정이나 헤이케 정권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숨겨주어 겐지와의 연결도 구축하였다. 헤이케가 몰락한 뒤에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의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하고자 애쓰면서, 한편으로는 요리토모에게 쫓겨온 요시쓰네를 받아주어 요리토모의 습격에 대비하는 등 뛰어난 정치적 대처를 보였다.[20]
장인인 후지와라노 모토나리는 원래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근에 친척들이 다수 존재했고, 요시쓰네의 생모인 도키와 고젠(常盤御前)의 재혼 상대인 이치조 나가나리(一條長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오슈 후지와라 씨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인물로 평가되나, 그의 죽음으로부터 불과 2년 만에 오슈 후지와라 씨는 멸망하였다.
4. 유산
- 호겐 2년(1157년), 아버지 모토히라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아 오쿠로쿠군의 주가 되었다. 데와국・무쓰국의 오료시가 되어 양국의 군사・경찰 권한을 관장하며 17만 기의 무사단을 통솔했다.
- 사금 산출과 대륙과의 무역 등으로 막대한 경제력을 축적하여, 교토의 평등원 봉황당을 능가하는 규모의 무량광원을 건립했다.
- 거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정 및 헤이시 정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숨겨 겐지와의 연결고리를 구축했다. 헤이시 몰락 후에는 요리토모와 평화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는 한편, 요시쓰네를 히라이즈미로 받아들여 요리토모의 공격에 대비하는 등 뛰어난 전략성과 정치적 수완을 보였다.[10][11]
- 냉정 침착하고 호방한 인물이었다고 하며, 여러 작품에서 영명한 군주로 묘사된다.
- 사후 불과 2년 만에 오슈 후지와라 씨가 멸망했지만, 오슈 후지와라 씨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4. 1. 곤지키도(金色堂)
1950년 3월, 오슈 후지와라 씨 3대의 미라에 대한 학술 조사가 이루어졌다.[34] 당시 곤지키도(金色堂) 서북쪽(당에서 보면 오른쪽)은 모토히라의 단, 서남쪽(왼쪽)은 히데히라의 단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종 보고에서는 모토히라와 히데히라의 유체가 서로 바뀐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4년 7월 『주손지 유체 학술조사 최종보고(中尊寺御遺体学術調査 最終報告』에 따르면, 히데히라의 혈액형은 A형, 신장은 167cm(역대 당주들보다 큼)였다. 크고 짧은 목에 둥근 얼굴, 발달된 어깨와 가슴에 비해 허리 아래는 비교적 작았다. 비만 체질에 충치가 있었고, 오른쪽 반신불수 흔적과 뇌일혈 또는 뇌전색으로 급사한 정황이 밝혀졌다.히데히라의 유해는 미라 상태로 히라즈미 주손지 곤지키도수미단 금관 내에 안치되어 있다. 1950년 유체 학술 조사에서는 곤지키도 서북쪽(오른쪽)이 모토히라 단, 서남쪽(왼쪽)이 히데히라 단으로 조사되었으나, 이후 최종 보고에서 유체가 뒤바뀐 것으로 판명되어 현재는 오른쪽 서북쪽이 히데히라 단이다. 1994년 『주손지 어유체 학술 조사 최종 보고』에 따르면, 히데히라는 신장 164cm, 떡 벌어진 어깨, 비만 체질로 추정된다. 넓고 두꺼운 허리, 높은 콧대, 길고 턱이 튀어나온 큰 얼굴, 굵고 짧은 목을 가졌다. 중증 치조농루와 충치는 미식의 결과로 보인다. 엑스레이 검사 결과 척수 염증이 확인되었으며, 사인은 척추 외상으로 인한 균 감염, 골수염성 척추염 또는 척추 결핵으로 추정된다. 골수염성 척추염으로 패혈증이 병발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병상에 누운 기간은 길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척추 경직으로 굽지 않아 만년에 와상하지 못했을 가능성, 고혈압, 부종, 신장 질환, 심기능 부전 등이 관찰되었다. 혈액형은 AB형, 사망 연령은 60-70세 전후로 추정된다. 오른 손목에는 염주 자국이 두 줄로 있었다. 부장품은 나무 지팡이, 나무・유리 염주, 금장 수정 노옥, 흑칠칠 태도 칼집 조각, 라, 백능, 비단, 금동령 등 당대 일류 공예품이었다.

4. 2. 문화적 영향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냉정하고 호방한 인물로, 여러 작품에서 뛰어난 군주로 묘사된다. 그는 사금 산출과 연해주와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교토의 뵤도인 봉황당을 본뜬 무료코인(無量光院)이라는 대사원을 건립하는 등 북방에 이상적인 낙토를 건설하려 했다.[10]
히데히라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정 및 헤이케 정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숨겨주어 겐지와의 연결고리도 구축했다. 헤이시 몰락 후에는 요리토모와 평화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는 한편, 요시쓰네를 받아들여 요리토모의 공격에 대비하는 등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보였다.[11]
히데히라의 장인인 후지와라노 모토나리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근 가문 출신이었으며, 요시쓰네의 생모인 도키와 고젠의 재혼 상대인 이치조 나가나리도 그 친척 중 한 명이었다.
히데히라 사후 불과 2년 만에 오슈 후지와라 씨가 멸망했으나, 그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5. 계보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후지와라노 모토히라(藤原基衡) | |
어머니 | 아베노 무네토(安倍宗任)의 딸 | 이설 있음 |
정실 | 사사키 히데요시(佐々木秀義)의 백모 | 이설 있음 |
계실 | 후지와라노 모토나리(藤原基成)의 딸 | |
첩 | 에미시(蝦夷) 출신의 여성 | |
처 | 노부오 사토 씨(信夫佐藤氏)의 여성 | |
장남 | 후지와라노 구니히라(藤原国衡) | 생모 불명 |
차남 |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 | |
삼남 | 후지와라노 다다히라(藤原忠衡) | 생모 불명 |
사남 | 후지와라노 다카히라(藤原高衡) | 생모 불명 |
오남 | 후지와라노 미치히라(藤原通衡) | 생모 불명 |
육남 | 후지와라노 요리히라(藤原頼衡) | 생모 불명 |
딸 | 불명 | 생모 불명, 친딸이 아닐 가능성 있음 |
히데히라의 생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아베노 무네토(安倍宗任)의 딸로 알려져 있지만, 후지와라노 모토히라(藤原基衡)가 아베노 무네토의 딸을 정실로 맞이한 것은 가독을 계승한 후의 일이며, 히데히라는 그 이전에 태어났다는 주장이 있다. 이 경우 히데히라의 생모는 모토히라가 가독을 잇기 전의 부인일 것으로 추정된다.[31]
미라 분석 결과, 아버지 모토히라의 혈액형은 A형, 히데히라는 AB형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히데히라의 생모는 B형 또는 AB형으로 추정된다.[31]
히데히라의 첫 정실에 대해서는 『아즈마카가미』(지쇼 4년 8월 9일조)와 『히라이즈미지』(平泉志)에 "사사키 히데요시(佐々木秀義)의 백모"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사키 계도』(佐々木系図)에는 히데히라의 어머니(사사키 다메토시佐々木爲俊의 아내)가 아베노 무네토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히데요시의 백모"는 모토히라의 정실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 경우 히데히라의 정실은 후지와라노 모토나리(藤原基成)의 딸(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의 어머니)뿐이다.[32][33]
6.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유아(遺児) 전승
시모쓰케 국의 고케닌 나카무라 아사사다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유아였다는 전승이 있다. 도치기현 모오카시의 벤쇼지 고사지[24][25]와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 신데라마치(新寺町)의 엔묘지(圓明寺) 연기[26]에는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명을 받은 히타치보 카이손이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아들 츠네와카(센토세마루)를 히타치 뉴도 넨사이(다테 아사무네)에게 맡겼다. 츠네와카(센토세마루)는 후에 아사사다라고 칭했다"는 동일한 전승이 남아있다. 이 전승은 서로 연고도 관련도 없는 원격지에 존재한다.
벤쇼지 고사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분지(文治) 중, 후지와라노 야스히라 추토의 군공으로 상을 받아 동지에 상을 받으니, 오슈(奥州) 다테(伊達) 땅으로 옮겨졌다. 이보다 먼저, 히타치보 카이손이라는 자가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명을 받아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아들 츠네와카를 품에 안고 나카무라에 와서 넨사이에게 맡겼다. 넨사이는 다테로 옮겨가면서 히타치 칸자 타메무네에게 나카무라 가문을 타메무라에게 양도하고, 타메무네를 자신의 아들로 삼아 성인이 된 후 나카무라를 잇게 했다. 후에 나카무라 쿠라우도 요시무네라고 했으며, 또한자에몬노조 아사사다로 개명했다.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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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奥州藤原三代について
https://web.archive.[...]
2007-05-29
[2]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3]
백과사전
Minamoto Yoshitsune
http://search.eb.com[...]
Encyclopædia Britannica
2007-01-30
[4]
웹사이트
熊野の説話/滝尻王子、藤原秀衡の子捨て
http://www.mikum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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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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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平泉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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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料総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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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料総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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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料総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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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史料総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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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治承〜文治の内乱と鎌倉幕府の成立
清文堂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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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大日本史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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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炎立つ (NHK大河ドラマ)
[17]
서적
大日本史料
[18]
서적
玉葉
文治3年9月29日
[19]
서적
大日本史料
[20]
서적
玉葉
文治四年正月九日
[21]
서적
血液型の話
[22]
간행물
藤原基衡と秀衡の妻たち
東北史学会
[23]
간행물
中世武士の移動の諸相
桜井書店
[24]
문서
真岡市史案内
[25]
서적
伊達氏と中村八幡宮
中村八幡宮
[26]
서적
源義経周辺系図解説
批評社
[2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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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서적
교쿠요
분지 3년 9월 29일조
[3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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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지 4년 정월 9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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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血液型の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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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藤原基衡と秀衡の妻たち
東北史学会
[33]
간행물
中世武士の移動の諸相
桜井書店
[34]
서적
中尊寺と藤原四代
朝日新聞社編
昭和 25年 8月 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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